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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과 탐식

주류의 맛으로 승화한 사찰 음식

by 신사임당 2018. 4. 30.

 

지난해 불교문화사업단이 미국 뉴욕에서 실시한 사찰음식 홍보행사에 현지 미디어 및 미식 관계자들이 참가해 사찰음식을 맛보고 있다 /불교문화사업단 제공

 

사찰음식 전문가로 잘 알려진 선재 스님이 최근 신임 한식진흥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임 이사장의 국정농단세력 연루의혹이 제기됐던 데다 기관의 갑질 및 채용비리까지 불거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독배’가 될 수 있는 직무를 수락한 데는 스님 나름의 고민과 판단이 있었다. 한식을 수출상품이 아닌 생활과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평소 스님은 “건강한 먹거리를 사랑하고 음식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삶의 바탕이자 문화가 되어야 한다”면서 “한식을 진흥하는 것은 전시성 행사를 통한 수출 증진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파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스님이 이사장으로 선임된 것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사찰음식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오랫동안 특정 종교의 수행방편에 머물렀던 사찰음식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히 인지도를 높이면서 주류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그동안 한식은 궁중음식, 혹은 종가(반가)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현재는 사찰음식 역시 궁중음식 못지않은 한식의 대표 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외국인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정관스님

 

조계종 산하 불교문화사업단이 운영하는 사찰음식 교육센터 ‘향적세계’는 매년 수강생이 10% 이상씩 늘어나고 있다. 2016년에는 전년 대비 10%, 지난해엔 전년 대비 13% 증가했다. 강의 요청이 늘어나면서 올해 5월에는 장소를 목동에서 종로로 확대 이전하고 강좌 수도 늘리기로 했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사찰음식 체험관 역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일반인들의 방문은 물론이고 초·중·고생의 단체견학, 외국인들의 방문도 줄을 잇는다. 서울 진관사를 비롯해 전남 장성 백양사, 경기 남양주 봉선사, 대전 영선사, 경남 양산 통도사, 대구 동화사 등 사찰음식 특화 사찰로 지정된 곳들 역시 음식을 맛보고 배우려는 문의가 늘고 있다.

사찰음식의 가치가 주류무대에서 인정 받게 된 것은 사찰음식 전문점인 ‘발우공양’이 미슐랭 스타 식당에 선정되면서다. 세계 최고 권위 레스토랑 평가안내서인 ‘미슐랭 가이드’는 2016년부터 국내 레스토랑을 대상으로 미슐랭 스타 식당을 선정했다. 조계종이 운영하는 발우공양은 2년 연속 미슐랭 1스타에 선정됐다. 상당히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예약이 좀처럼 쉽지 않을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찰음식이란 말 그대로 절에서 스님들이 수행하는 데 필요한 섭생을 위해 먹던 음식이다.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오신채(마늘, 파, 달래, 부추, 흥거)와 육류를 사용하지 않는다. 침샘을 자극하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맛과는 거리가 멀다. 탐식을 부추기는 시대에 사찰음식이 인기를 얻는 것은 역설적이다.

사찰음식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건강과 웰빙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물론 불교계의 노력도 컸다. 특히 1세대 사찰음식 전문가로 꼽히는 ‘스타급’ 스님들의 활약은 사찰음식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톡톡한 기여를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노력을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선재 스님은 조계종에서 선정한 사찰음식 명장 1호다. 오랫동안 대중강연과 저술활동을 하며 높은 지명도를 쌓아온 스님은 프랑스 르 코르동 블루 등 세계 3대 요리학교에 초청 받아 강연하는 등 한식과 사찰음식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 왔다.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진관사는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를 비롯해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덴마크 노마의 수석 셰프 르네 레드제피, 오바마 대통령 시절 백악관 부주방장 샘 카스, 뉴욕의 미슐랭 3스타 셰프 에릭 리퍼트 등 글로벌 스타들이 진관사를 찾아 음식을 맛보고 배워갔다.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은 사찰음식 명장 2호다. 세계적 호텔 체인인 포시즌스가 판매하는 럭셔리 패키지 여행상품 ‘프라이빗 제트 투어’에는 한국 여행 시 방문해야 할 곳으로 진관사가 포함됐을 정도다.

박원순 시장과 진관사에서 식사하는 르네 레드제피(오른쪽) /강윤중 기자

 


전남 장성 백양사 천진암 주지 정관 스님은 사찰음식 인지도를 국내·외에 수직상승시킨 계기를 제공했다. 2015년 <뉴욕타임스>는 정관 스님의 음식 세계를 조명하는 기사를 다루며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음식’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미국의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 데이비드 겔브는 정관 스님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을 제작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이 작품은 베를린 영화제에도 초청됐다. 자연 속에서 식재료를 채취해 음식을 만드는 스님의 일상을 종교적 수행의 관점에서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이후에는 영국 <가디언> 등 해외 언론의 취재 요청이 쇄도했으며 지금도 스님에게 요리법을 배우려는 셰프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홍승 스님, 우관 스님, 적문 스님, 대안 스님 등도 활발한 출판과 대중강연으로 사찰음식의 기틀을 다져온 1세대 전문가들이다. 최근에는 사찰음식을 각 가정에서도 먹을 수 있도록 한 배달서비스도 나와 눈길을 끈다. 조계종 포교원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동국대에서 오랫동안 강의해온 홍승 스님에게 사찰음식을 배운 재가자들이 설립한 ‘도반 F&B’는 사찰음식을 가정에서 맛볼 수 있는 프리미엄 반찬 서비스를 내놨다. 홍승 스님은 이 회사의 레시피 개발을 돕고 있다.

선재스님과 권우중 셰프/정지윤 기자

1세대 스님들이 각개전투 형태로 사찰음식 보급에 힘써 왔다면, 2세대 스님들은 불교문화사업단이 사찰음식 체계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2010년 이후부터 대중교육과 해외 홍보활동에 뛰어들고 있다. 사찰음식 2세대로 꼽히는 스님들은 대전 영선사 법송 스님, 남양주 덕암사 도림 스님, 경북 울진 불영사 여몽 스님, 한국사찰음식체험관 지도법사 형민 스님 등이다. 경기지역의 사찰음식 본가로 불렸던 수원 봉녕사에서 살림을 책임졌던 동원 스님도 최근 활발한 대중강의를 하고 있다.


불교문화사업단은 사찰음식 대중화를 위해 전문인력도 양성하고 있다. 2014년부터 전문조리사 자격시험을 실시해 현재 180여명의 전문조리사를 배출했다. 사업단이 해외 한국문화원과 협력해 진행하고 있는 사찰음식 홍보행사도 현지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사찰음식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해외에서 역으로 사찰음식 홍보를 요청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불교문화사업단 김영일 사무차장은 “사찰음식 시연회와 강좌, 템플스테이에 관한 안내 등으로 구성된 현지 행사는 불교문화 전반은 물론이고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교문화사업단은 올해 홍콩,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를 찾아 사찰음식을 알릴 계획이다.